영양군 농촌기본소득 현지조사 외전

“자녀들의 방문이 늘어났다. 팔십 넘은 분들은 혼자 움직이는 게 힘든데, 농촌기본소득을 쓰자고 자녀들에게 전화도 자주 걸고, 자녀들도 자주 온다. 특기할만한 변화라고 할 순 없지만, 긍정적이지 않겠나.” 농촌기본소득 면담조사에서 여러 차례 나온 이야기였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배, 할매와 영양읍 식당에서 주문하자마자 할배가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해줘”라며 농촌기본소득 카드를 꺼냈다. 화구에 불도 채 켜지지 않은 찰나였다. 철물점에 들러서도 부엌 화구, 페인트 붓을 하나 샀다. “카드 되니껴?” 된다고 하자, 이번에도 농촌기본소득 카드를 꺼냈다.

밥 먹고 집에 도착해 앉았다. 지난해 어깨 수술을 한 할배는 손을 드는 게 어렵다. “이제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고 싶은데, 쓸 수가 없어. 머릿속에는 다 있는데 쓰는 게 안 돼. 네가 대신 좀 써주면 좋겠다.” 알겠다고 답을 하고서 녹음기와 노트, 카메라를 챙겼다. 1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아직 녹취를 풀지 못했지만, 노트에 담아 둔 메모를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1. 출생과 성장

할배(강문희)는 1938년 12월에 영양군 청기면 무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94년생(갑오년), 어머니는 1904년생(갑진년). 할배는 9남매 중에 넷째인데, 가정사가 복잡하다. 위로 누나 둘은 첫째 부인 태생이었고, 할배의 어머니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할배가 첫째였다. 아래로는 또 배다른 이복 여동생 둘이 있었다. 할배는 7살에 어머니를 여의였다. ‘장질부사(장티푸스)’ 전염병이 돌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배를 키운 건 할머니였다. “나는 할매 손에 컸어. 나는 엄마라고 불러 본 기억도 없어. 그래서 할매 돌아가시고 산소에 공덕비를 세웠어. 할매는 자식도 손주도 없었거든.” 의아한 말이었는데, 할배의 할배도 가정사가 복잡했다. 서른 살에 재가해서 왔는데, 자식이 없었고, 1959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배를 키웠다고 한다. 할배의 할매는 평창 이씨, 이월이. 1959년 6월에 돌아가셨다.

 

#2. 한학(漢學)

할배는 7살부터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영양 일대를 다니며 한학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 9살에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한학을 배웠다. 국민학교 졸업하고도 1년 동안 한학을 배웠다. 기력이 있던 3년 전까지도 할배는 유학 경전을 읽고, 글을 썼다. 그래서 그런지, 면담 동안 3번이나 반복해서 자랑스럽게 한 이야기가 있었다. “스승님이 진성 이씨 집안이었는데, 돌아가시고 비문을 내가 썼어. 문하생 70명 중에 내가 대표로 썼어. 호는 봉초, 함자는 이구. 안동 서지동에 묘소를 썼고, 비문을 썼어.” 할배가 한학을 그만두고 중학교에 진학한 계기는 결혼이었다.

 

#3. 결혼

할배가 15살, 할매가 20살에 결혼했다. 1952년.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 않았던 때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연상의 배우자를 만났다. 중매를 섰다고 하는데, 장인이 할배의 글솜씨에 흡족해했다고 한다. 할매는 1933년생, 봉화군 재산면 출신이었다. 귀가 어두워서 할매 이야기를 더 듣기가 어려웠다. “한학을 1년 더 공부하고 나니, 이 사람(할매)이 한학은 그만하고 중학교를 가라고 하더라고. 나(나이) 많은 사람이 하라고 하니까 했지.” 그렇게 17살에 영양중학교에 입학했다. 할배는 영양읍에 있는 “더부(두부)하고, 기름짜는 집에서 하숙했어. 토요일에 버스타고 집에 와서 월요일 아침에 학교까지 걸어갔어. 월요일 영양읍 나가는 버스가 없어서 새벽에 걸어갔어.” 중학교 재학 중에 첫째 딸이 태어났다. 약 300명 중에 차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사대부고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졸업 일주일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경제적으로는 고등학교 갈 수 있었지. 근데 어째. 아버지 돌아가시니 내가 고등학교 갈 수가 있나.”

 

#4. 6.25전쟁과 김달삼부대

영양군 청기면 무진동은 봉화군 재산면과 인접한 지역으로 청량산을 끼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고 진실규명도 이뤄진 곳이다. 그래서 “6.25전쟁 때는 어떠셨어요?”라고 묻자, 첫 대답이 나왔다. “국민학교 때 인민군이 와서 인공기도 몇 개월 그렸어. 5촌 하나는 뻘갱이들이 집도 태우고 총으로 쏘고 그랬어. 대낮에 내려와서 쌀이랑 무명하고 달라고 하고. 우리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아서 빨갱이들이 안 들어왔어.” 청량산 일대에 김달산 부대가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빨치산에 의한 피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6.25때 아버지가 예비검속으로 2개월 동안 당동국민학교에 잡혀갔어. 빨갱이한테 부역했다고. 작은어머니(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 친정 오라버니가 빨갱이였거든. 그래서 우리 집 소를 몰고 갔어. 그것 때문에 빨갱이들한테 부역했다고 잡혀갔는데 다행히 살아나왔어.” 할배의 아버지는 돌아왔지만, 무진동 인근 당동에서는 군경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양 산골 출신에 부모님도 안 계시고 자녀까지 셋, 부양해야 할 동생이 넷이 있었는데 군대를 갔다. 그것도 경남 창원의 39사단으로. 1961년이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 할배가 군대 있을 때 태어났다.

 

#5. 새마을운동

할배는 “‘혁명’일어나고 군대에서 박통한테 투표하고 제대했어”라고 했다. 곧이어 새마을운동을 벌인 자부심 섞인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혁명’과 ‘박통’을 언급한 건 서두에 딱 한 번이었다. “제대하고 65년부터 동장을 5년, 엽연초생산조합 총대 20년, 새마을지도자 15년을 했어. 새마을운동은 대단했지. 월구, 살매, 꺼끄마꼴까지 부지 해결만 하면 작업은 정부가 했어. 그때까지는 청기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없었어. 무진에서 준공식하고 도로를 냈어. 내가 450평을 내놨고,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설득했어. 지붕개량하고, 보 세우고, ‘새마을다리’도 만들었어. 마을 창고도 짓고. 70만 원이 들었는데, 내가 먼저 20만 원을 내놓고 돈을 모았지.” 할배는 전매청장으로부터 1976년 모범총대 표창장, 잎담배생산우수부락 표창장, 1977년 잎담배증산새마을지도자상, 재무부장관으로부터 1977년 표창장을 받았다. 논 20마지기, 밭 6000평 농사를 일구며 새마을운동의 주인공이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통이 시켜서 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2남6녀 자식들을 키우고, 동생 4남매도 키워냈다.

 

#6. 민정당

“오한구, 강신조, 또 누구더라. 심부름하다가 애만 먹었지. 남는 게 없었던 것 같아.” 할배는 1982년 민주정의당 경북 제9지구당 부지도장으로 위촉됐고, 그로부터 민정당 지역 조직책 활동을 했다. 1984년 11월에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에서 연수과정도 수료했고, 전경환이 총재로 있는 새마을회 활동도 이어갔다. 오한구-강신조까지 국회의원이 바뀌고, 민주자유당으로 정당이 바뀌고도 청기북부협의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애만 먹었지”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7. 일생의 동반자

할배는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쉬운 건 없는데, 내가 이 사람보다 먼저 갈 것 같애. 같이 가야하는 데…” 할매는 귀가 안 좋지만, 할배보다 기력이 왕성하다. 우리집 네 식구가 온다고, 아침부터 골뱅이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어둘 정도였다. 할매랑 싸운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 나보다 나(나이)가 많잖아. 말을 들어야지. 그것도 있지만, 이 사람이 성질이 급하긴 한데, 사람이 착하잖아. 얼굴에 다 써 있어.” 본인이 못다한 공부를 시키겠다가 대구 대현동에 주택을 얻어 자식들을 일찍이 내보냈다. 두어달에 한 번씩 용달 트럭을 빌려 쌀과 부식을 실어다 날랐다. “그랬는데 맘대로 안 됐네. 살생한 게 자꾸 눈에 밟혀. 이 사람 막내 들어섰을 때 몸에 좋다가 구렁이를 잡아다가 고아 먹였는데. 살생을 한 것 때문인가…집안 제사도 잘 모시고, 다 잘했는데…”

 

1시간 10분이 넘어가자 할배의 기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표창장, 상장, 노트를 챙겨서 사진을 찍고서는 면담을 마무리했다. 국가의 시간대, 지역의 시간대, 생활의 시간대는 서로 겹치면서도 다르게 인식되어 흘러왔다. 엄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생애사를 역사의 시간대와 교차해서 보는 작업은 역사의 납작함을 메우는 일일 것이다. 다음 달에 또 온다고 했는데, 할배, 할매는 눈물을 글썽였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우예 아노.” 이것도 농촌기본소득의 효과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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