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처삼촌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제사를 지낸 직후였다. 성주효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25년, 26년 비슷한 시기에 가족 장례를 치르게 됐다. 할머니는 1935년생으로 아흔을 넘기셨고, 나와는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정신적인 충격이 크지 않았다. 정신을 못 가눌 슬픔보다는 장례를 치르면서 치러야 하는 행정적, 문화적 절차로 바빴다. 그리고 여러 가족들과의 관계, 우리 사회의 장례 문화를 고민해보게 됐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두서없는 메모를 남겨둔다.
1935년 여성의 삶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 절차의 행정적 처리는 내가 맡게 됐다.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를 받아서 화장장, 장지를 예약했다.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제적초본을 살펴보면서 숫자가 보였다. ‘1935년 2월생’. 1954년 결혼, 1993년 배우자 사별. 슬하에 3남 3녀. 경북 그 중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영양군 청기면에서 80년을 보냈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결혼. 6.25전쟁에 참전했던 배우자는 전쟁 직후 결혼과 함께 다시 재입대.
군대에 간 남편을 두고 산골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림을 살고, 1958년 첫 자녀를 출산. 재산이 넉넉한 종갓집은 아닌데, 조상 모시기에 애를 쓰는 남편, 5대째 큰집이라는 환경으로 뒤치다꺼리가 많았던 집안. 시부모님 기제사가 1년에 4번. (할아버지의 친 부모님은 그 대에서 둘째아들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큰아버지가 결혼 후 자식 없이 돌아가시자, 할아버지가 양자로 입적되었다) 1984년 첫 손녀, 1985년 첫 손자(둘째 아들 소생. 나).
고추, 담배 농사를 지내다가 1933년 배우자 사별 후 대구에 나간 큰아들네 집에서 거주. 손자들 돌봄. 10년 정도 대구 생활 후 영양 집으로 돌아와 텃밭 농사를 지으며 생활. 2008년 셋째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먼저 떠나보냄. 여든을 앞두고 뇌출혈 수술 후 기력이 쇠약. 마지막 10년은 큰 질병은 업었으나, 여러 작은 질병을 달고 살다가 세상을 떠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다니 그 배경이 보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장손의 자녀들을 살뜰히 챙겼다. 어린 마음에는 그런 할머니가 미웠다. 사고치는 둘째 아들은 타박하지 않고, 며느리인 엄마를 타박하는 모습도 미웠다. 이 미움이 커진 건 비교 대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2남6녀를 둔 외할머니는 손자-외손자만 스무 명이 넘었는데, 손자-외손자할 것 없이 애정을 많이 주셨다. 그러다보니 2026년에도 영양에 가면 나는 대부분 외할매 집에서 1박을 했다. 나이가 들고, 아프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나를 부쩍 찾았는데, 나는 시큰둥했다.
몇 년 전부터 1930년대에 태어난 여성인 할머니, 외할머니의 조건과 환경을 들여다보았다. 정분기. 1935년생. 연일 정씨. 친정은 영양읍. 가난한 집에서 막내로 태어나 정규학력도 다 마치지 못했음. 결혼한 시댁은 더 산골짜기인 청기면 산운동. 남편은 바깥에서 호인으로 평가받았으나, 집안에서는 매우 다혈질의 남성으로 매일 막걸리를 받아서 마심, 남편은 6.25전쟁 중 무릎에 총상을 입었으나,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함.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혼자 살아돌아왔다는 이유로 의심받으면서 살아 왔음. 남편과 키 차이도 30cm 이상. 넉넉하지 못한 형편. 1958년생인 큰아버지부터 1975년생인 막내고모까지 대학보낸 자녀는 없음.
장례_유, 불, 도, 기
여러 의례, 의식들을 보면서 떠올린 키워드는 ‘짬뽕’이다. 장례지도사가 진행하는 절차에는 유교, 도교, 불교가 다 섞여 있었다. 1993년 할배 돌아가셨을 때는 5일장을 지내고, 집 마당에 천막치고 빈소를 차리고, 장지에 상여 매고 매장을 했었는데 지금은 확 바뀌었다. 장례식장에서 지도사가 안내하는 대로 의례를 진행하고, 화장을 했다.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회구조와 문화의 힘을 새삼 느낌). 장례식장에서 전하는 검은 옷을 나는 안 입겠다고 했는데, 입어야 한단다. 다들 입고 있다. 할배 돌아가시던 30년 전에는 모두 삼베옷을 입었었는데. 왜 삼베옷이 검은옷으로 바뀌었는지 아무도 의구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둘째 고모의 교회 목사님, 성도들이 함께 와서 기도할 때, 온 식구가 모여서 예배를 본 장면이 가장 흥미로웠다. 고모는 일찍 인천으로 올라가 기독교에 의지하며 현재까지 어린이집교사를 하면서 매주 교회를 다니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절도 하지 않았다. 20년 전까지는 교회다니는 고모를 구박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할머니가 특히 그랬다. 그렇지만 고모는 늘 꿋꿋했다. 목사님 오신다고 모든 식구들에게 예배 준비하라고 안내했고, 군말 없이 스무 명 이상 모여서 15분 간 기도했다. 나는 찬송가도 같이 부르고 성경 말씀도 같이 읽었다. 예배 후 가족들의 말, “생각보다 짧게 했어.” 그 이상의 가치 평가는 없었다. 모든 의례, 의식의 원본은 없고, 지켜야 할 숭고한 의례도 없었다. 경북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회 규범의 변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더 정리해야 할 메모가 있지만, 곧 서울역에 도착한다.
‘화장장’, ‘여성 장례지도사’, ‘지방선거와 장례식’, ‘영양군 농촌기본소득’, ‘제적등본’, ‘요양병원’, ‘노제’, ‘6촌과 8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