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1월 수성동 동중 앞에서 <로얄서점>으로 시작하여 1986년 경신중·고등학교 앞에서 40년 동안 운영한 <경신서점>이 내일이면 문을 닫는다. 경신중·고등학교 앞 마지막 하나 남은 서점/문구사마저 문을 닫는다. 학교 앞 문구점이 사양길에 접어든 지 10여 년이 됐다. 장인과 처제도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홀로 남게 되면서 이어 왔다. 이제 개학 철이라고 학생들이 몰려오는 일도 없고, 온 가족이 달라붙어야 하는 일도 사라졌다. 막 결혼한 2014년,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새벽부터 나도 곧장 투입됐는데, 더는 가게에 손 보태러 가지 않은 지가 10년이 다 되어간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교재, 준비물만 판 게 아니었다. 기념일에는 카네이션, 장미꽃을 포장하여 팔았고, 어묵과 떡볶이도 만들어 팔았다. 그 공의 절반은 장모의 역할이었고, 아내를 포함한 딸 셋의 몫이었다. 여러 번 ‘그만 두시면 좋지 않겠냐’는 자식들의 의견보다 더 강력한 것은 도심 재건축 사업이었다.
은퇴를 앞둔 하루 전날 장인과 40분 정도 짧은 이야기를 기록에 담았다(더 자세한 구술 작업은 가게를 정리한 이후 하기로 약속했다). 1949년 경북 예천군 상리면 배바우길에서 태어나 줄줄이 남동생만 셋을 둔 장남은 하리면 출신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담배농사를 짓다가 1978년 1월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방 한 칸 딸린 문구점을 업으로 삼아 3녀 1남을 낳고 길렀다. 정직하고 우직했다. 뱃속의 둘째 아이가 세상에 나오려고 할 때였다.
“12시 쯤 진통이 온다 카는 기라. 근데 통행금지가 있잖아. 사전에 준비도 안 됐고 그게 진통이 온다 카니까 통행금지가 돼서 못 나간다고 생각하고 통행해제 4시에 되도록 기다렸다니까. 그게 늘상 내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래 4시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자전거타고 대현동에 있는 외사촌 형수 찾아가서 모셔와가 동신교 옆 윤산부인과에 갔어.”
“내가 여기 저자 장사할 때 그때는 손님이 자꾸 있으니까 밥 먹다 나와야 돼. 그 위장병이 있어 위상 과다 돼가 속이 쓰려 속이 비면 속이 쓰리거나 그러니까 뭘 좀 속이 더 가면 괜찮은데 그걸 참지 못해가지고 내가 참 행패를 많이 부렸어.”
“수성동에 있을 때 방 쪼만한 데 네 명이 있을 때 같이 발을 모으고 잤어. 그때는 오늘도 얘기했다만 족보도 다 버렸어. 설 때나 추석 때나 가야 현아만 데리고 가고. 집사람은 장사한다고 남아 있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흘러가는 시절을 붙잡지는 못하더라도, 생활사는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키워드=이촌향도, 경북 농촌 출신 대구 사람, 자영업, 인터넷서점, 범어4동, 재건축 등, 경신고, 가족노동.
